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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정의> 삼국시대 활에 기계장치를 연결시켜 화살을 쏘는 무기 노(弩)라고도 함 <발달과정/역사> 화살을 올려놓을 수 있는 틀(노상 弩床)을 마련하여 앞부분에 활을 부착시키고, 뒷부분에는 시위를 걸어 발사할 수 있는 장치(아 牙)를 설치한 것이다. 쇠뇌는 중국 춘추(春秋) 시대부터 사용하였다고 전해지는데, 점차 광범위하게 보급되었으며, 한대(漢代)에 이르러 흉노(匈奴)와 싸우는 과정에서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구조도 정교해졌다. 우리나라의 쇠뇌는 평남 강서군(江西郡) 태성리(台成里)의 15호 토광묘(土壙墓), 황해도 은파군(銀波郡) 갈현리(葛峴里) 부조예군(夫租 君) 무덤 등 낙랑유적지에서 출토된 발사장치 아(牙)·살촉 등에서 그 초창기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. 다만 이들 유물이 B.C 2∼B.C 1세기의 낙랑유적에 집중되고 있어 한반도에서 제작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. 삼국시대에 들어서는 신라군의 부대편성을 전한 {삼국사기(三國史記)}의 직관지(職官志) 무관조(武官條)에 "노당(弩幢)"의 기록이 보이며, {주서(周書)}의 고려전(高麗傳)에 고구려가 보유한 병기를 설명하면서 "노(弩)"를 언급하여, 고구려와 신라에서 쇠뇌를 전투무기로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. 백제의 경우, 자료나 유물이 전해지지 않으나, 고구려·신라처럼 사용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. 또한 {삼국사기}에는 당(唐)이 신라의 노사(弩師) 구진천(仇珍川)을 데려가 쇠뇌를 제작케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, 신라의 쇠뇌 기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. 이외에도 성(城) 위에 배치하였다는 포노(砲弩)나 이동식 대형 쇠뇌로 여겨지는 거노(車弩) 등의 사용 사례를 전하고 있어 다양한 전투양상에 알맞은 전투무기로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. 이러한 쇠뇌의 기술과 기능은 고려시대에도 계승되어 주요한 전투무기로서 사용되었음을 {고려사}(高麗史)의 여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. <일반적 형태 및 특징> 이 쇠뇌는 낙랑유적에서 출토된 방아쇠 아(牙)와 후대의 기록과 조선시대의 여러 가지 쇠뇌류를 참고하여 복원한 것이다.
기록의 바탕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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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자료 기준
- 2016-08-31
- 공공데이터포털 페이지 수정
- 2025-08-13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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